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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5: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사도행전 15장은, 사실 매우, 중요한 성경의 증거다.

당시에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었던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말로, 혀로,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말로, 혀로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가둬 괴롭게 하려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변론이 이어지는 증거가 사도행전 15장이다.

 

게바가 말하길,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결국 구원은 율법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줄 알았던 사도들은,

입으로, 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율법에 가둬 괴롭게하고, 또한 그 율법을 전하는 자들 때문에 괴로워하던 자들에게,

바나바와 바울, 유다, 실라를 보내, 그 괴로움에서 자유케 하게 하고,

다만, 우상의 제물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 증거하게 한다.

 

그러던중,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와 함께 다시금 수리아,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하게 되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는 순간이다...

 

마가라 하는 요한이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마가라 하는 요한이, 복음을 전하지 않은것도 아니요, 일을 하지, 않을것도 아니다...

다만, 바나바와 바울과 떨어져 부여받았던 사명, 율법에 메여 괴로워하던 자들을 자유케 하라는 그 사명대로,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기어 너의 생각은 어떠냐. 이게, 죄가 되냐.

일을 안한것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지 않은것도 아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도 분명히 헌신적으로 교회를 다니며 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 그 마가라 하는 요한을, 바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라낸다! 왜?

이게, 영의 세계라...

 

"본질적인 관계는, 절대로 뒤바뀌어선 않는다"를 시작하며,

사도행전 15장 36절 이하의 구절을 소개한 이유는, 바로 이 영의 세계를 증거하고 싶은 때문이다.

바울은, 이 영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던 인물이다...

 

근본적인 질서를 훼방하는 자, 근본적인 종으로써의 사명을 망각하는 자, 따라서,

근본적인 관계를 망각한 자, 그자를 용납한다는 건, 곧 사단을 용납하겠다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먄악 바울이 한가지로 일하지 않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용납했다면,

그후, 마가라 하는 요한은, 절대로, 혼자서 오지 않는다.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근본적인 질서를 훼방했기 때문이며,

예수가 주, 내가 객이라는 근본적인 관계를,

예수가 객, 내가 주로 뒤바꿔놓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를 용납하면, 반드시 사단이 그 "마가라 하는 요한"과 함께 온다.

바울은 이 영의 세계, 영의 질서, 영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남과 여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와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롬6: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위와같이 증거했다.

그의 뜻대로 행해주면, 그의 뜻대로 따라주면,

그가 너의 주인이며, 너는 그의 종이라...

 

가령 A라는 남자와 B라는 여자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A에게, 회사 동료(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A는, 그 회사 동료(여)가 위로가 필요하고 말동무가 필요하다며 집을 나서려고 한다.

반면 B는, 회사 동료일 지라도 늦은밤 전화를 걸고, 늦은밤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나가는게 좋지않다 말린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존재하겠다.

부부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다른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성경이, 로마서 6장 16절과 같이 증거했으므로,

어떤 이유에서든 그 회사 동료를 위로하기 위해서, 말동무가 되어주기 위해 집을 나선다면,

적어도 그 순간엔, 내 연인보다, 내 아내보다 또는 내 남편보다 그 회사 동료(남 또는 여)가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것이 된다.

이게, 열매다.

 

연인 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는 남자와 여자?

남편 보다 소중한 남자가 있는 아내? 아내보다 소중한 여인이 있는 남편?

내 갈비뼈 보다 소중하고, 내가 매달려 동행해야 할 남자 보다 소중한 남자가 있는 여자?

이런 자들과, 결혼, 만남, 생각지도 말아라.

이는 저주라.

 

그런데도,

세상의 사람들은,

주권자를 모르고, 질서를 모르는 인생들은,

여러 변명과 그럴싸한 말장난으로 그 가증한 행위를 선함으로 포장한다.

내 갈비뼈가 먼저인지, 아니면 위로가 필요한 다른 여성이 먼저인지,

자신의 행위가 누가 먼저라고 증거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국가가 먼저인지 국민이 먼저인지, 등등등,

말장난들을 한다.

 

 

기만에 빠지지 말라.

 

인생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내가 바라봐야 할 관계는 예수와 나 사이의 관계인데, 때때로 오만가지 관계에 관심을 드러내곤 한다.

자신의 관심사 혹은 묻 영혼을 향한 그 관심이,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인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이게, 사람이다...

 

바울이 "마가라 하는 요한"이란 자를 저주한 게 아니다.

바울이 "마가라 하는 요한"이 쓰러지길 기도한 게 아니다. 다만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한가지로 일하지 않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예수와 요한 사이의 관계야.

 

네가 누구관데 주를 대신할 수 있으며, 주를 흉내낼수 있겠나.

우리가 어떤 영혼들을 걱정하면, 그 영혼들을 책임질 수 있나.

그 영혼들이, 내가 또는 네가 아니면, 예수를 만나지 못하냐.

 

이 글을 읽을 기어들 중에서 가령 강아지를 키운다 가정해보자.

너도 피조물이고, 너의 강아지도 한낯 피조물이다. 너는, 너의 강아지를 위해 피를 흘릴수 있냐.

피조물도 피조물을 위해 피도 흘리지 못하는데,

창조자가 그 피조물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롬5: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런 예수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의 사랑이 엄청나서 영혼들을 책임지고 싶어하는 냥,

그 기만, 그런 기만에 빠지지 말아라.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마가라 하는 요한이, 예수 앞에 온전히 서면, 그만이다.

마가라 하는 요한이, 예수 앞에 온전히 서고, 예수와의 1대 1의 관계속에 있다면, 예수가 요한과도 동행하지 않겠나.

그러나 그를 내가 또는 네가, 용납한다 아니다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이는 사랑이 아니며, 도리어 창조를 흉내내고 스스로 창조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 영혼의 구원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끊임없는 육의 속삭임이며, 육의 저주라.

 

 

원죄를 기억하기 바란다.

 

 

너의 뜻이었다 아니었다란 변명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하와는 왜 하와고, 아담은 왜 아담이냐.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들의 뜻이었든 아니든,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뜻대로, 사단의 바램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 행위, 이 열매가 중요해.

 

이 누구의 뜻대로 행위하는가의 문제는, 너의 주인이 누구냐를 결정하는 문제며,

로마서 6장 16절은 이를 증거한 것이다.

누구의 뜻? 누구의 뜻을 따라 행위 하느냐가,

너의 주인이 누구냐를 증거하는 열매다.

 

만약 이 글을 읽을 기어들이 굳이, 신경써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다만, 예수에게 그들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 한가지다.

그 영혼을, 우리가 또는 네가, 책임질 수 있는게 아니다.

다만, 창조자에게 의탁할 뿐이야...

그 나머지는, 너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적 관계학

 

 

 

 

+ 주와 객은, 절대로 뒤바뀌어선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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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객은, 절대로 뒤바뀌어선 않는다. 행15: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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