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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교훈

 

 

 

 

 

 

여순반란 사건 계기…군대내 좌익 색출, 국회 프락치 사건…국가 보안법 제정돼

 

 

남한내 공산주의 활동 ‘극성’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 즉 여순 반란은 갓 건국한 대한민국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공산주의자의 만행으로, 혹은 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을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여순 반란 직후 정부가 군대 내부에 있는 공산당 세력을 뿌리 뽑는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숙군 작업’이라고 합니다.

 

숙군 작업이 시작되자 군대 내부에 있던 좌익 세력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공군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해군이 소형 경비정을 몰고 북한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또 춘천의 2개 대대 750명이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38선을 넘은 뒤 대대장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대대원들이 탈출을 시도해 반 이상 되돌아오기는 했지요. 하지만 북한은 이런 일을 내세워 “이승만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1949년 7월까지 이어진 숙군 작업으로 전체 군인의 10%에 달했던 좌익 세력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건전한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그 자리를 메워 군대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지요. 그 다음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은 군대가 집단으로 투항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자기들 편에 설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숙군을 철저히 한 덕분입니다.

 

또 여순 반란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은 나라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담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의 활동이 불법적인 일이 됐습니다.

 

그 무렵 친일 인사라 부르는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임기 2년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했죠.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 친일 변호사, 친일 작가, 친일 역사학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해방 후 3년 동안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는데 뒤늦게 친일파로 처벌받게 됐다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당시는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을 때였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좌익 세력이 설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경찰을 동요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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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 – 43G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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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