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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이야기

"강만수(姜萬洙) 전 기획재정부 장관, 글로벌 금융위기 맞서다 딸을 잃다"

 

 

 

고위 공직자로 있으면서 ‘강만수’만큼 욕을 얻어먹은 이도 드물 것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는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있을 때 두 차례의 국가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언론도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평생 일했던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는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을 낸 강만수(姜萬洙) 전 장관을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위치한 개인연구실(디지털경제연구소)에서 만났다. 그는 책에서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정부당국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자세히 썼다. 인터뷰는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인간적 소회(所懷)에 맞췄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잖아요. 그리고 딱 1년, 장관으로 있었습니다. 정부 출범 첫해에 미국 발(發) 금융위기가 터졌죠. 1997년 IMF 이후 또다시 국난(國難) 상황이 온 겁니다. 그런데 여론은 제게 모든 책임을 돌렸어요. 올드보이, 킹만수, 강고집, 수구 또라이 기득권 부자 그만 챙겨라…. 저를 비난하는 말들이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고요. 비난을 넘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까지 들었습니다. 결국 2009년 2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아니 쫓겨난 거죠.”

 

글로벌 위기가 발생하자 강 장관은 금리와 환율, 외환관리에 집중했다. 아울러 한미(韓美) 통화스와프도 체결했고 증세(增稅)를 위한 일시적 감세(減稅)정책도 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고 강렬했던 순간들이었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은행이 금리, 환율, 물가 정책 등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자 당시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와 감정적 충돌까지 갔다. 그런 와중에 정치권과 언론이 그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위기와 싸우는 것보다 정치권, 언론의 비판에 맞서는 데 더 힘들었다”고 했다.

 

‘아빠, 장관 그만두면 안돼?’

 

<아버지를 비난하는 악성 댓글에 괴로워했던 강만수 장관의 딸(맨 왼쪽)은 유방암 초기 판정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말기 암 환자가 됐다. 서른셋이 되던 2011년 딸은 마침내 천국으로 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경기도의 한 숲속에서 딸과 손녀딸, 부인과 함께.>

 

그런 와중에 2남1녀 중 막내인 딸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200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유방암에 걸렸다는 거예요. 다행히 초기(初期)여서 수술만 잘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곧바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고 나라가 위기상황에 처하면서 저를 포함해 온 집안 식구는 비상사태에 빠진 것처럼 살았어요. 딸 스스로도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지요.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일반인은 물론, 학자, 정치권, 언론이 벌떼처럼 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난이 한창 계속될 무렵, 딸이 제게 ‘아빠, 장관 그만두면 안 돼? 언젠가 아빠가 그랬잖아. 장관을 지낸 후배들 앞에서 만년(萬年) 차관 소리를 듣는 게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며 하루짜리 장관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하루가 아닌 몇 달 동안이나 장관을 했으니 이제 그만둬요. 아빠가 욕 얻어먹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어’라며 여러 날을 눈물로 호소했지요. 그러면서도 딸아이는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다’며 저를 욕하는 인터넷 악플과 싸우며 한동안 밤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아빠 때문에 자신이 암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셈이었어요. 장관을 그만둘 무렵, 딸은 말기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불과 6개월 만에 초기 암 환자에서 말기 환자가 된 거죠. 담당 의사도 ‘6개월 만에 이렇게 악화되는 경우는 드물다’며 안타까워했어요. 저도 눈물로 한동안을 보냈지요.”

 

딸의 묘비에 시(詩)를 쓴 아버지

 

암 투병으로 심신(心身)이 지친 강 장관의 딸은 결국 2011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결혼해 어린 딸 하나를 둔 상태였다. 강 장관은 딸의 묘비에 이런 시를 남겼다.

 

<소리 없이 찾아온 병마와 싸울 때에 / 산에서 아파했고 바다에서 행복했노라 / 시같이 영혼은 가고 애통은 가슴에 묻었노라 / 네 육신 고이 싸서 관에 넣은 이 애비 / 흘러간 삼십여년 네가 있어 행복했노라 / (중략) 두고 떠난 너의 딸 씩씩해서 아프노라 / 할애비 아무래도 에미 자리 메울쏘냐 / 시 되어 천국 간 너를 오늘도 그리노라(2011년 가을 시가 되어 떠난 딸을 그리며)>

 

딸을 잊지 못한 강 장관은 이런 시도 썼다.

 

<어제는 윤진이와 ‘백조의 호수’를 보았는데 / 백조들의 군무에 박수치고 즐거웠다 / 할미와 함께 갔으니 세 식구 즐거웠노라 / (중략) 윤진이를 어찌할꼬 마지막 너의 말에 / 할미 할애비 키울 테니 걱정 말라 했지만 / 우리가 아무리 해도 에미 사랑 같으랴 / 씩씩하게 학교 가고 숙제도 잘하다가 / 엄마 있는 천국이 얼마나 먼지 물을 때는 / 세 식구 부둥켜 안고 울기도 하였노라(딸이 두고 간 손녀를 키우며 2012년 가을 미사리에서)>

 

강 장관은 이번에 낸 책에서도 먼저 떠난 딸에 대한 아픔을 보여주는 한 편의 시를 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과정에서 딸을 잃은 강 장관의 사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신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외골수’ ‘강고집’만 기억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어요. 제 스스로는 고집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한 일들은 반드시 하는 비(非)전략적 우둔함만 있을 뿐이지요. 옳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옳고, 해야 할 일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저는 공직에 있을 때 정책의 가부(可否)를 분명히 하고, 확실하게 지시를 하고, 선제적이고 단호하게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독선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 그에 따라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일한 동료들은 저와 일하기가 오히려 편하다고 했어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강 장관은 “일을 하면 비판을 받기 마련”이라며 스스로 생각하는 공직자의 상(像)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발이 넓고 타협을 잘하는 관료를 가장 싫어합니다. 무사한 관료는 한 것도 없고 그래서 욕 들을 일도 없지요. 무능한 관료는 때로 실수를 하지만 가르치면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만한 관료가 더 문제입니다. 최고위 관료인 장관은 단호하게 일을 하고 결과로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게 공직 경험에서 나온 공직자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강 장관은 ‘관료’를 국가의 최후 보루(堡壘)로 여긴다. 관료가 대중에 영합하면 국가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 영합주의가 민주주의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관료들의 사명감과 패기라고 강조했다.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던 날, 그는 환율실세화, 경상수지 흑자,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정면돌파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장기간 장관으로 있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약속한 대로 그는 퇴임 때까지 종합부동산세를 제외하고 두 가지를 달성했다.

 

이명박(MB) 정권 초 그가 잡은 경제 틀은 MB정권 동안 대부분 지속됐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회복했고, 7위 수출대국, 연구·개발(R&D)투자율 1위 국가, 자본수출국으로의 전환, 아시아 최고 신용등급, 룰 메이커(rule maker) 국가, 지원국으로의 전환 등의 성과를 올렸다. 이런 결과물에는 그의 선제적 처방과 정책집행이 밑바탕이 됐다.

 

외신(外信)이 먼저 시작한 긍정 평가

 

<강 장관은 최근 사실적 회고록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을 냈다. 그는 책에서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자신을 포함한 정부당국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자세히 기록했다.>

 

강 장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외신(外信)에서 먼저 나왔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서울의 관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2009년 7월)’라는 기사를, 영국 언론은 ‘한국은 더 이상 패자가 아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국제기구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OECD는 한국의 재정금융정책을 ‘OECD 국가 중 최고’라고 평가했고, IMF는 ‘교과서적 사례’라고 했다.

 

국내 언론의 우호적 보도는 나중에서야 나왔다. 언론은 ‘소신, 1년이 다른 장관 10년에 필적’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 세계가 인정’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평가했다.

 

장관에서 물러난 지 3년 뒤인 2012년 11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획재정부를 출입했던 기자들이 강 장관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감사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한국경제는 시련과 위기 속에 피어난 도전의 역사입니다. 당신은 늘 그 도전의 앞자리에 섰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기획재정부 장관으로서 한국경제가 위기를 딛고 일어나도록 이끌었습니다. 설득엔 서툴렀지만 포기하거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흐리지만 영혼이 깃든 정책은 남습니다. 당신의 헌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때로는 비판하며, 때로는 옹호했던 기자단이 오늘 이 자그마한 감사패를 드립니다. 2011년 11월 15일 금융위기 당시 기획재정부 출입기자단>

 

강 장관은 장관 퇴임 이후 국내 언론에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성과가 나올 때까지 변명이든 뭐든 아무 말을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다. 외신의 긍정적 보도가 나온 직후 《월간조선(2009년 9월호)》과의 인터뷰가 퇴임 후 첫 언론 등장이었다.

 

일을 해서 비판받는 것은 일하는 관료의 숙명입니다. 관료는 대중의 비판과 비난에 굴하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씁니다. 그래도 진정한 관료는 맡은 일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패기를 갖고 실패를 두려워 말고 일을 해야 해요. 멀리 보고 일을 하면 더 큰 비판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국민은 무력하거나 방관하는 관료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대통령 경제특보로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계속 도왔다.

 

많은 비판과 반대 속에서도 50여 개에 달하는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덕분입니다.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도 저의 견해에 반대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저를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준 최중경 차관(이후 장관 역임)을 비롯해 신제윤, 이용걸, 윤영선, 임종용, 최종구, 이찬우, 손병두, 최상목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4대강사업, ‘천성산 도롱뇽’처럼 진실 가려질 것

 

강 장관은 자신이 모셨던 이명박 대통령과 지금도 주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년간 회고록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최근 원고를 완성, 현재 수정단계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만간 모 출판사를 통해 출간할 예정이다.

 

강 장관은 국회 국정조사 대상이 된 역대 정권의 자원외교에 대해 “정권마다 자원외교를 해 왔다. 이명박 정부 때도 활발히 진행됐지만 내 업무가 아니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역점 사업이었던 4대강사업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다목적 한반도대수로 사업이 최초 모델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내륙수운 개발과 함께 치수(治水)사업, 수자원 보전, 내륙개발, 경기부양, 서비스산업 인프라 확충 등 여러 목적이 있었어요.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한반도 대운하사업’으로 발표되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운하사업은 여러 목적 중 하나에 불과해요. 아무튼 집행과정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총 22조원이 투입돼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을 준설하고 친환경 보(洑)를 설치했지요. 하천 저수량 확보, 생태계 복원, 관광레저산업 인프라 구축에 기여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수질이 악화됐다, 부실공사다, 너무 빨리 진행했다 등 여러 얘기가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4대강사업 이후 우기(雨期) 때 항상 있었던 대형 홍수가 극히 줄었고, 수천억 원에 달하는 복구비용 또한 현저히 줄었다는 점입니다. 4대강사업에 대한 평가는 천성산 도롱뇽 사건처럼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가려질 것이라 생각해요.”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강 장관은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경제부처 책임자들이 적절한 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며 “나라를 잘 이끌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강 장관은 올해 한국경제에 대해 이렇게 전망했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공존합니다. 밝게 보는 이들은 노동력, 자본재고, 총요소생산성의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둡게 보는 이들은 올해를 기점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정점에 달하고, 노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며, 청년들도 패기를 잃고 있다는 점에서 비관적입니다. 저는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국내외 환경이 다소 어려운 것 아닌가 생각해요.”

 

그에게 대한민국이 일류국가로 우뚝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내리막을 걷지 않고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경제, 균형사회, 개방국가라는 3대 전략을 반드시 실현해야 합니다. ‘공격해야 승리한다’는 패기를 가져야 해요. 공격이 없으면 비길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지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도 반드시 해소해야 해요.”

 

강 장관은 일류국가로 가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열 가지 전술도 들려줬다.

 

가장 으뜸이 되는 과제는 법의 지배입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먼저 경제 과제로는 환율 주권(主權) 수호, R&D 투자 확대, 최고의 기업환경 조성을 들 수 있지요. 사회 과제로는 사회자본 확대, 보금자리주택 확대, 필요적 사회보장 실시가 있습니다. 대외 과제로는 재외동포 지원 확대, 해외진출 확대가 있고, 마지막으로 통일준비 및 완성을 들 수 있지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데르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적혀 있다. 그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구(詩句)가 아닐까.>

 

강 장관은 공직생활을 43년간 했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의 인생은 비판과 비난의 범벅이면서 한편으로는 성취의 역사이기도 했다. 강 장관은 자신의 인생 역정(歷程)을 이렇게 정리했다.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나 꽃이 만발한 고향 앞산에 올라가 진달래를 따 먹던 일이 엊그제 같아요. 교실이 없어 수양버들 밑에서 시멘트 블록을 책걸상 삼아 공부하던 초등학교 시절,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도시로 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도시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나네요. 부산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어렵게 공부하던 고교 시절, 선생님에게 맞아 코피를 쏟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설가의 꿈을 꾸기도 했지요. 서울의 겨울이 너무 추워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던 대학 시절과 밤열차에서 만난 사람과 해운대 백사장을 거닐던 기억도 문득 떠오릅니다. 공무원이 돼 처음 받은 누런 월급봉투에는 2만3544원이 들어 있었고, 주미(駐美) 대사관 재무관 시절의 추억은 공직생활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좌파 정부 10년간 야인(野人)생활을 하며 구름에 달 가듯 세월을 낚다가 이명박 정권을 창출한 것은 인생의 최고 도전이었습니다.

 

도전과 응전의 시간을 보낸 강만수 장관. 수많은 일들이 그의 뇌리에 기록되고 지워졌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의 죽음은 세상 끝날 때까지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러시아 시인(詩人) 알렉산데르 푸슈킨의 시가 적혀 있다. 그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구(詩句)가 아닐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끝까지 참고 견뎌라. 그러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지만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으로 남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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