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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오늘.
 
어두 컴컴한 방안. 기다랗게 늘어선 창문이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창문 중간이 조금 열려있다. 날이 몹시 추운 이 겨울에 밤새 창문을 열어 놓았나보다. 추운 겨울인데도 창문을 조금 열고 자서인지 방안은 바깥 날씨 만큼이나 차갑고 방안 벽마저 꽁꽁 얼었다. 그리고 한 쪽 벽면을 길게 채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방안 실루엣은 더욱 짓게 내려앉아있다. 나무로 짜여진 오랜 세월을 견뎌온 것 같은 창틀은 창문너머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바람소리 만큼이나 요란하게 덜그럭 거리고 방안 천장 한쪽 구석엔 빛물이 샌 자국이 선명하다. 이 집이 견뎌온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창틀 앞엔 창문 너비 만큼이나 기다란 책상이 있고, 책상위엔 두 서너권의 책과 경(經)이라 선명하게 쓰여있는 경전과, 재떨이, 담배, 라이터가 전부다. 다른 한쪽 벽면엔 짐을 가득 채운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좁고 비좁은, 집임을 느낄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재운은 책상 맞은편 벽에 붙어선 몸을 벽을 향해 돌아 누운채 두꺼운 겨울 이불을 코 끝까지 덮고있다. 두 눈을 깜박거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재운. 이제 막 잠에서 깨었나보다. 재운 너머로는 재운이 누워있는 바로 앞에 좌식 테이블이 있고 재운의 노트북이 열려있다. 노트북 모니터엔 재운이 쓰고있는 시나리오가 열려있는데 “제목: “표”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그런데 무엇인가 재운의 방문 앞에서 방문을 긁적이는 소리가 들린다. 긁적긁적. 아마도 이 소리에 재운이 잠에서 깨었는지도 모른다. 재운이 몸을 휙 돌이켜 노트북이 보여주는 시간을 확인하는데, 정각 1시다. 이불을 저치고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여는 재운.
 
“둘라야~ 잘잤어~”
 
재운이 키우는 강아지 둘라가 일어나라고 방문을 긁었나보다. 재운이 방문을 열자 둘라는 꼬랑지를 흔들며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온다. 평소 같으면 재운이 방문을 여는 소리에 ‘일어났니?’ 하며 건너방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어머니의 방문으로 시선을 옮기고 자세히 들어보니 어머니가 계신 건너방에선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재운이 다시 살며시 방문을 닫는다.
 
“우리 둘라 잘잤어? 삼촌이 일하느라 방문을 닫아놨지... 잠깐...”
 
재운은 둘라를 잠시 쓰다듬고는 곧장 창문으로 다가가 밤새 열어놓았던 창문을 굳게 닫고는 누워있던 아랫몫으로 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꼬리를 흔들며 이런 재운을 지켜보고 있던 둘라는 재운의 품으로 들어와 훌러덩 돌아눕고 긁어달라고 성화다. 재운이 이불을 들어올려 어깨까지 감싸더니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온 둘라에게 연신 입을 맞추며 몸을 긁어준다. 
 
"우리 둘라 잘잤어?"
 
둘라에게 입을 맞춰주고 몸을 긁어주면서 재운의 시선은 노트북이 보여주는 시간과 둘라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다. 오늘따라 둘라의 몸을 긁어주는 손놀림이 빠른것을 보니 그의 마음이 시간에 쫒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운의 집은, 방문을 열고 나오면 재운의 방보다 작은 거실이 있고 재운의 방 옆방엔 어머니가 계신다. 거실은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재운이 거실로 나와 둘라의 먹이와 물을 챙겨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제서야 어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아마도 이제서야 전화통화를 끝내셨나보다.
 
“일어났니?”
“어.”
"밥먹어야지?”
“아니야. 산에 다녀와서.”
“너 빈속에 밥안먹고 산에 가는거 안좋은데…”
“괜찮아.”
 
이상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조금 상기된 느낌이다. 마치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져 흥분한 사람처럼 말이다. 어머니의 성격도 성향도 재운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느낄수 있는 것이다. 겨울엔 일을 하실수 없어서 별로 기쁜일이 없으신 분인데 오늘은 어쩐 일일까. 어머니가 기분이 좋은 일이 있으시면 재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재운의 표정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둘라는 바쁘게 재운을 쫓아다니고 재운이 책상 옆 한 쪽에 있는 둘라의 밥그릇에 새 물과 사료를 주니 둘라가 꼬랑지를 흔들며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재운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선 이런 둘라를 잠시 지켜보고다가 곧 화장실로 향한다.
 
“나 씻어.”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없으시다. 재운이 살며시 건너방 문 앞으로 다가가니 어머니가 누워계신 건너방에선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또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있는 음성이 들린다. ‘어머… 어머 그랬구나. 어머…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되니?' 재운은 어머니의 음성 많으로도 어머니가 누구와 전화통화를 하는지 않다. 지금 전화통화를 하고있는 사람은 분명히 호조연일 것이다. 재운이 무표정하고 조금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실문을 조금은 세개 닫는다. 쾅. 어머니께 자신의 감정 표현을 한 것이다.
 
5시간후...
 
시간은 저녁 6시 20분. 해가 저물어 가는지 어느새 창문 너머는 붉고 또 어두 캄캄하다. 재운이 집을 나서려나보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메고 있는데 둘라는 어김없이 집을 나서려는 재운을 붙잡고 싶어서 재운의 발앞에 앉아 재운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본다. 
 
“삼촌 일하고 올께. 맘마 먹고있어.”
 
재운이 둘라를 한참동안  쓰다듬는다. 둘라를 혼자 두고 가야하는 재운도 발이 쉽게 떨어질리는 없지만, 매일매일의 일상이 익숙해서 인지 오늘도 둘라가 잘 있어주길 바라며 현관으로 향한다. 둘라가 혼자 있을걸 생각해서인지 방 불을 켜 논 상태로 말이다. 
 
“엄마 나 가.”
“너 가니? 왜 이렇게 일찍 나가?”
"약속이 있어서 어디좀 들렸다가 일 시작 하려고. 오늘도 자고 올거지?"
 
재운은 가방을 맨 채 신발끈을 묶고있다.
 
“엄마 걱정하지마. 얘 너 운전 조심해라."  
“어."
“얘, 너 엄마 1월까지 돈 해줘야된다. 엄마 2월엔 장사 나가야돼. 주문이 계속 밀려있어.”
“알아.”
 
둘라는 애처롭게 재운만 빤히 쳐다본다. 재운이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론 둘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얘, 형 네 집에 강아지 한마리 생겼잖아. 개가 그렇게 예쁘게 논데. 아주 지 데리고 운동 나가는 시간까지 다 알고 운동나갈 시간되면 현관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린데.
“그래?"
"얘, 형이 그러는데 둘라도 매일 운동 시켜줘야 된데. 제 저렇게 집에만 있으면 오래 못산대.”
 
순간 재운이 신발끊을 다 묵고 몸을 일으키며 굳게 닫혀있는 건너방 문을 빤히 쳐다본다. 한참동안 눈을 깜빡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더니 쓴 웃음을 짓더니 쓴 웃음을 흘린다.
 
“그게 할 소리래? 저녁 먹어."
 
재운의 어머니는 아무런 댓구도 하지 않는다. 재운이 자신의 어머니를 잘 알듯, 재운의 어머니라고 왜 재운의 성격을 모르시겠는가. 재운이 호조연이란 여자를 나쁘게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재운의 눈을 피하고 재운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호조연을 몰래 만나시는 어머님이신데. 사실은 그래서 재운의 형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밤 일하러 나가는 아들에게 말로나마 아들이 싫어하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아닌 변명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12월의 겨울 바람이 매섭다. 빌라와 빌라 사이의 좁은 골목길엔 모퉁이마다 가로등이 켜져있고 인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재운은 이런 어머니를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왜? 어차피 재단에서 매일 만나고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라서? 재운은, 자신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한없이 끌려다니는 어머니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호조연이 잘 사는 모습에 재운의 어머니는 호조연에게 붙잡혀 있다고 재운은 믿고있다.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 다 내세우는 분이시지만, 실상은 그 내세우시는 자존심 마져도 끌려다니기 위한 어머니 많의 방식임을 재운은 너무도 잘 않다. 그런 어머니가 가엽다. 재운이 골목 사이사이, 모퉁이와 모퉁이 사이를 쉼없이 돌고 돌아 동네를 빠져나간다. 모자가 달린 두꺼운 점퍼를 입없음에도 잠시 잠깐 재운의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통에 벌써 볼이 붉게 물들었다. 재운이 허름한 주택가 골목길을 빠져나와 저멀리 찾길 건너편 지하철역이 보이는 공원을 걸으며 담배를 입에 물곤 담뱃불을 붙힌다.
 
“니는 니 집 사정을 몰라서 둘라를 툭 던져놓고 갔구나. 나이먹고 병든 니 어미한테 니가 툭 던져놓고 간 저 개를 내가 10년을 돌봤다. 기억은 하냐. 돌아서면 까먹지 니들은... 새 개를 키울 생각은 들면서 니 어미에게 던져놓고 간 개를 데려갈 생각을 안들디? 잔머리 돌아가는데로 생각날때 부모 위한답시고 전화해서 알량한 자랑질이나 하면 그게 부모 위하는 거냐. 그렇게 부모 위한다면서 그런데도 가련한 니 어미 모시고 살겠다는 말은 도저히 입밖으로 안 나오지. 알겠다 그래… 인생이 원래 그런거란다… 원래 지 입으로 지 자신을 삼키는게 인생 이란다. 죽기전엔 알고 죽어라..."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꼭 짚어 넣고는 입엔 담배를 물고있는 재운의 입가엔 미소가 그윽하다. 이 미소가 기쁨의 미소는 아니리라. 어두움이 짖게 내려앉는 밤, 그나마 한줄기 남은 사라져 가는 노을을 응시하며 재운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그나저나 엄마는 이제 장사 못해… 이제 엄마 그 장사 못하게 하신데… 다행이지… 그래야 피차 덜 힘들지…"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재운은 지하철안에 자리가 많이 있음에도 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둠이 짓게 깔려서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재운은 우둑허니 문에 기대어 서서는 창 밖만 멍하니 내다본다.
 
어느새 약속한 역에 도착한 재운이 승강장안을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더니 저만치 승강장 맨 끝자락으로 향한다. 승강장 맨 끝자락엔 열차를 기다리는 서너명의 사람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재운도 그곳으로 다가가 그 서너명의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선 함께 담배를 피운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지상 승강장에서 태우는 담배맛은 남다르다. 원래 흡연을 해선 안되는 장소여서 그런지 떨리기도 하고 긴장도 되고… 담배를 태우며 등 뒤를 몇 번을 돌아봤을까. 저만치 승강장 계단에서 한 남자가 쇼핑백을 들고 내려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재운이 이 남자에게로 다가간다.
 
"저 혹시 카메라 판매자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재운은 이곳에 중고 카메라를 구입하러 온 것이다.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남자가 쇼핑백에서 카메라를 꺼내 재운에게 보여주고 재운은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한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재운이 열차 문에 기대어 서서는 카메라의 LCD 모니터를 통해 바깥 어두움이 짓게 깔린 풍경을 감상중이다. 마치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이 느껴지기라도 하는듯 재운의 표정엔 기대감이 가득하고, 카메라의 LCD 모니터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설레이고 있다. 
 
24시간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 대리운전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고있다.
 
“오늘 재운인 일 안하려나보네.”
“불러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할까?”
“형이 전화한번 해 보던지? 재운이 오네.”
 
맞은편에 앉아있는 기사 머리 너머로 다가오는 재운의 모습이 보인다. 대리운전 기사들을 본 재운의 표정은 사뭇 밝아졌다. 재운은 가방을 메고있고, 앉아있던 두 기사에게 다가와 가방을 내려놓은뒤 옆에 앉는다.
 
“일찍 나왔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일 안하는줄 알았네.”
“너 불러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할려고 했는데.”
“아 그래요… 콜 없어요?”
“월요일인데 콜 있겠어? 그냥 한 번 나와본거지.”
“어제까지 연휴였으니까 더 없지…”
 
재운에게 이들은 좋은 분들이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 보았다. 질 나쁘게 남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보았고, 성심 성의껏 남의 차를 운전해 주는 기사들도 보았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해가 뜬 후에 귀가하는 어떤 대리운전 기사분이 네 딸을 데리고 극장에 가시는 모습도 보았고, 대리운전을 해줬는데 돈을 주지 않는 손님도 겪어 보았고, 때로는 받지 말아야 할 팁도 받아보았다. 어쩔땐 사는곳에서 멀리까지 운전도 해 보았고, 그렇게 아일랜드 이곳 저곳에서 마주치고 만나는 대리기사들마다 재운은 늘 생각했다. 아… 이러니까 대리운전을 하시는구나… 사기 칠 줄도 모르고, 어찌보면 단순하고, 그저 내 한 몸으로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 보려는 사람들. 어디를 가나 질 나쁜 인생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재운의 눈에 비친 대리운전 기사들의 모습은 이와 같았다. 재운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재운에게 이들은 고단한 삶을 잊게 해주는 친구고, 동업자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돌파구고, 위안이고 위로다.
 
“잡았다.”
“형 잡았어? 어여 가 봐…”
“소주 한 잔 하시자면서요?”
“오늘 마시지 말라네.”
“수고해.”
"수고하세요…”
 
이들과 나눌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많지 않지만, 그런 너무도 단순한 대화가 재운은 좋다. 복잡한 대화를 할 필요가 없고, 오늘 일을 나와서 얼마를 벌 수 있을까 또는 얼마를 벌었나가 주된 이야기 거리며 다른 주제라봐야 대리운전에 관한 노하우, 위험한 지역 또는 집으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갔을때 어떻게 하면 돌아 올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 정도다. 밥을 함께 먹거나 술을 함께 마실 때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오늘 번 일당으로 나누면 된다. 돌아서면 저마다의 고민과 삶의 무게가 있겠지만 이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 만큼은 아무런 고민거리가 없다. 서로서로 스트레스를 풀고 풀어주려 위로하고 격려하고 우스게 소리를 하는게 전부다. 여름이면 땀을 비오듯 흘리며 뛰어다니다 마주쳐도 반갑고, 겨울이면 고개를 점퍼안에 푹 눌러쓰고 걷다가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불러주는 이들이 반갑다. 늘 자신을 찾아주는 이들이… 재운은 이런 그들이 고맙다…
 
한 시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재운의 곁엔 아무도 없다. 한참동안 스마트폰을 보며 일감을 찾고 있던 대리운전 기사들이 어느새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재운은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 앉아있다. 일을 하러 나온건지 아니면 사람 구경을 하러 나온건지, 무엇이든 안되는걸 억지로 하려하는 성격이 아니다. 또... 여름보다 겨울이… 이 밤에 이 차가운 바람을 맞는것이 재운에겐 너무 특별하다.
 
“재운아!”
 
재운이 한참동안 바람을 맞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형님…”
 
재운과 잘 아는 대리기사가 재운에게 다가와 옆에 앉는다.
 
“일 많이 했어?”
“아니요. 아직 못 잡았어요…”
“야 10신데 아직 첫 차도 못탔어?”
 
재운이 다소 부끄러운듯 웃는다. 옆에 앉은 대리기사는 이런 재운을 걱정해 준다. 그러더니 대리기사가 사무실로 전화를 건다.
 
“어 난데… 저기 재운이… 재운이 아직 첫 콜도 못잡았데. 어어. 그냥 하나 싸 줘 벌써 10신데… 여기 배삭이지...”
“아이 그러지 마세요…”
 
재운의 표정에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넌 괜찮아. 서로 도와야지.”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내가 감사하지. 야 너 여동생 애 돌잔치와서 찍어준 사진때문에 지금 난리라니까. 사진관 할 마음 있으면 하라니까. 내가 투자할 사람 모은다니까.”
“아니예요…”
 
대리기사는 자꾸만 사업에 관한 썰을 풀어댄다. 재운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다. 두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순간 재운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들린다. 띵동.
 
“어?”
“콜 왔어? 어여 가…”
“아 형님 감사해요.”
“뭐가 감사해. 어여 가. 운전 조심하고.”
 
재운도 대리운전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돌아선다. 오늘도 빈손으로 들어가진 않으려나보다. 때때로 오늘은 빈손인가 보다 하곤 했지만, 재운은 한번도 빈손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늘 자신이 목표한 돈을 벌곤 했었다. 새벽 1시가 다 되기까지 한 콜도 잡지 못했던 그 날에도, 그래서 다른 기사들 보기가 민망해 숨어서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그 날에도 결국 새벽 2시가 다 되어서 잡은 첫 콜이 이곳 배삭에서 진항으로, 진항에서 무곡으로 그리고 끝내 다시 두전동으로 되돌아와 목표한 돈은 돈대로, 집까지 되돌아 올 수 있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급할것도 없고 초조할 필요도 없고, 내일도 또 한걸음을 내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재운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재운의 표정은 사뭇 행복하다.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서 꿈을 포기하지 않을수 있고,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만치 한적한 차도에 차 한대가 비상들을 깜빡거린다. 그리고 그 차도 옆 엔 작은 포장마차가 서있다. 재운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켜져있는 차 시동음은 더욱 커져만 가고,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와 여자의 실루엣도 선명해진다. 똑똑똑.
 
“대리가사 부르셨죠?”
“어서오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재운이 인사를 한 뒤 운전석에 앉는다. 남자는 재법 살과 덩치가 느껴지고 안경을 썼다.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눈매는 날카롭고 거만해 보이지만 의외로 점잖게 행동한다. 옆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때문일까.
 
“두전동에 이 아가씨 바래다주고 난 다시 배삭으로 올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재운이 차를 몰기 시작한다. 아주 가끔씩 재운이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과 여를 살펴본다. 남자의 말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로 봐서, 남자는 분명 옆에 앉아있는 여자의 직장 상사다. 그의 나이는 대략 50대 중반. 여자는 어리다.
 
“그러니까 난 니가 좀 다르게 살면 좋겠다는 거야. 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딱딱하지 않게. 넌 나한테 내가 원하는 것 좀 해주고, 난 니가 원하는 것 좀 해주고, 서로 윈-윈 하면서…”
 
대략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이 여자의 직장 상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갈과 협박을 그럴싸하게 하고 있다. 자유로움을 이야기 하면서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지 살아남는지 덧붙이고, 자유롭게 살 생각 없냐고 말하면서 사람의 몸을 몸뚱아리라 천박하게 표현한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남자의 말이 정말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이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직장 상사가 앉아있는 왼쪽으로 조금 틀고 앉아서는 남자가 하는 말을 경청할 뿐이다. 여자도 남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으리라. 그렇게 40여분이 지나자 어느새 여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여자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뜸을 들여야 할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 재운에게 차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재운은 차 밖으로 나와 저만치 벤치로 다가가 앉고는 뒷좌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슬쩍 본 후, 담배불을 붙인다. 이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재운에게 여전히 신선하다. 여자의 아파트 길 건너편엔 재운이 잘 알고있는 대리운전 기사가 스마트폰을 열심히 쳐다보며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걷고있다. 재운은 반가워서 미소를 머금지만 그의 바쁜 걸음을 멈춰 세우진 않는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차 안 두 사람을 확인하는 재운.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본다. 저 두사람이 오래 이야기를 나눠 주었으면… 조금이라도 이 바람을 더 맞고싶다… 대리운전 비용도 올라 가리라...
 
어느새 자정을 20분 넘겼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리운전 기사에겐 시간이 곧 돈인데 재운도 언제까지만 기다릴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순간 뒷좌석에 앉아 남자의 말을 듣고있던 여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여자는 남자에게 끌려가는것이 싫은 모양이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핑계 거리는 충분하다. 그런데도 왠지 남의 일에 끼어드는게 달갑지는 않다. 어찌해야 하나. 차 안 두 남녀는 서로 마주보듯 몸을 반쯤 돌려 서로의 몸을 응시하고 있다. 똑똑똑. 순간 차 안 남과 여가 깜짝 놀란다. 잠시 놀란 가슴을 달래며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남자가 창문을 내린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죠. 알아서 계산은 다 해 드릴께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장님, 정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요. 그리고 이 분… 이렇게 싫다는데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시죠. 더군다나 유부녀인것 같은데...”
 
재운이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빤히 보고있다. 순간 재운은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일까. 아무튼 재운은 자신이 여자를 구해줬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리고 남자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그 날카로운 시선을 반쯤 내려깐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재운이 못마땅한 것이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잠시후,
 
“알았습니다. 알겠스니까 조금만…”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차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재운은 다시 벤치로 향한다. 차 안에 앉아있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몹시 화가간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앉아있다. 그런데, 옆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의 안색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분 나쁨이 재운 때문임을, 그녀가 돌아서서 벤치로 향하는 재운을 흘겨본 사실로 알 수 있다.
 
“대리기사 주제에 별 참견을 다하네요. 상무님, 오늘은 그만 들어가는게 좋겠어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요.”
“음. 그래. 들어가…”
 
재운이 벤치에 앉아있는데 여자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이고 여자가 재운에게로 다가오며 재운을 쏘아본다. 재운도 자신을 쏘아보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리곤 여자가 재운을 스쳐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내로 들어간다. 
 
“아… 내가 잘못 본 거구나. 몸을 부르르 떤게 아니라 고개인 거였나...?”
 
괜한 참견을 했다는 생각에 재운이 피식 웃는다. 왜그렇게 놀랐을까. 뜨거운 열정으로 손이라도 꽉 움켜쥐고 있었나보다. 차 안에 홀로남은 남자는 생각에 잠겨있다. 재운이 갖잖은 것이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대리기사를 어떻게 해야할까. 재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오늘 밤의 계획이 못내 아쉽다. 호흡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드리마시며 화를 달래다가 이제서야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기사님! 가시죠!”
 
그동안 대리운전을 하며 몹쓸짓을 하는 사람도, 몹쓸 광경도 자주 본 까닭이겠지만, 어쨌든 만감이 교차한다. 여자를 돕기는 커녕 남의 연애를 방해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쨋든 선택은 두 사람의 몫인데 괜한 참견을 한 것이 씁쓸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재운이 일어서서 차로 다가간다.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았았죠.”
“아닙니다.”
 
이제는 재운이 남자의 눈을 피하는 눈치다. 그리곤 두 사람이 차에 탄다.
 
“저기, 제가 볼 일이 좀 생겨서 그러는데, 지단으로 좀 가 주시겠어요. 차비는 다 계산해서 넉넉히 드릴께요.”
“지단이요? 네. 알겠습니다.”
 
지단… 지단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수 있는 방법은 아예없다. 운이 좋으면 조충원 역까지 걸어 나오는데 한 시간. 지금 시간에 지단에 들어가서 운이 나쁘면 조충원 역에 새벽이 다 되어서야 빠져나올수 있는 곳이다. 어쩌겠는가. 손님이 가자는데. 재운이 차 시동을 걸곤 다시금 차를 몰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지단까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혼자만의 자격지심일 지라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50대 중반 남자의 안경 뒤에 감춰진 음흉한 눈 빛에선 대리기사인 자신을 비웃는 비웃음이 느껴지고, 지단 지역의 산을 한 번 두 번 넘으며 해코지를 당하겠구나 느끼는 재운도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차는 어느새 세 번째 산 중턱까지 다다랐다.
 
“됐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여기부턴 제가 몰고 갈께요.”
 
재운은 동물적으로 시간을 먼저 확인한다. 새벽 2시 20분. 
 
“네 그러시죠.”
“운전 참 차분하게 해 주시네요. 자 여기.”
 
남자는 재운에게 대리운전 비용을 지불하고 차에서 먼저 내린다. 재운도 돈을 받고는 차에서 내린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한 후, 남자가 차에 올라타자 재운도 올라왔던 산을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그의 속마음은 시내까지 태워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기까지 하다. 재운이 슬그머니 등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저만치로 차를 몰고가선 차를 돌리고 있다. 그리고는 잠시후, 보란듯이 산을 내려가는 재운을 스쳐 지나간다. 재운은 그저 아쉬울뿐이다. 그나저나 얼마나 걸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왠 짐승들 소리가 이리도 많이 들리는 것일까. 산 여기 저기서 알 수 없는 짐승들의 다양한 소리가 재운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든다. 발 밑 땅바닥도 보이지 않는 칡흙같은 어두움으로 두려움마저 재운을 엄습하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곳에서 자신이 잡을수 있는 콜은 아예없다. 
 
“에잇.”
 
재운이 아예 스마트폰의 대리기사용 어플을 꺼버린다. 그러더니 재사가를 부르며, 재사가를 부르다가 또 기도를 하다가를 반복하며, 차가운 겨울날씨를 피하기라도 하려는듯 호주머니에 두 손을 꼭 짚어 넣고는 산을 내려간다.
 
“나~ 사는 도옹안~”
 
조충원 역. 역 앞 시계탑이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세 시간 남짓 걸어 온 것이다. 재운이 역 계단을 올라간다. 이 역의 첫차는 7시인 까닭에 아직까지 승강장은 닫혀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시간이면 오갈때 없는 대리운전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지 않을까.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하고 싶어한다. 역 안으로 들어온 순간, 재운이 깜짝 놀란다. 저만치 역 안 의자에 주연이 앉아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고있기 때문이다. 재운이 주연에게로 다가간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한가득이다.
 
“주연아…”
“어?”
 
재운을 보더니 주연이 더 놀란 눈치다. 동그래진 그녀의 눈빛에서 재운을 몹시 반가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뭐해?”
“정주갔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차 얻어타고 나왔어요.”
“그래. 지금 5시 넘었는데, 아직도 콜 잡아?”
“아니요. 심심해서 보고만 있는 거예요."
 
이주연… 그녀를 만나고 재운은 세 번을 놀랐었다. 처음 주연과 인사를 나눈건 2년 전. 다른 기사님들께 주연을 대리기사로 소개를 받았는데 너무 예쁘고 날씬한 어린 아가씨가 대리운전을 한다는 사실에 처음 놀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년 밖에 되지않은 어린 아가씨가, 아버님도 운전과 관련된 사업을 하셔서 어려서부터 운전을 하고 싶어했고, 그 바람에 면허를 일찍 땄고, 운전이 좋아서 대리운전을 한다고 말하던 주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나이 또래에 이 외모면 다른 일도 쉽게 구할수 있을텐데... 사실 주연은 대리운전 경력으론 재운 보다도 선배다. 두번째 놀란건 주연이 이사를 했던 때였다. 주연과 친분이 두터워진 삼촌뻘되는 대리기사님들이 주연에게 술 한 잔 얻어 먹으려고 이사를 돕는다고 했던 그때, 재운도 주연의 이사에 함께 했었다. 그녀가 이사한 곳, 신비동… 차이나타운 아닌 차이나타운.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 주연이 이사한 집은, 의젓하게 서있는 원룸도 아닌 오래된 개인 주택의 방을 다닥다닥 나누어 한 방씩 원룸형태로 만들어 세를 두는 곳이었다. 하기사 신비동 그곳에 좋은 원룸이 있을 턱은 없었다. 사실 재운은 그날 이후로 주연에 대한 근심이 끊이지 않았었다. 워낙 위험한 동네고,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맑고 곱고 착한 아이에게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재운은 그곳을 지날때마다 주연 생각을 했었다. 
 
“오늘도 옷 얇게 입었네?"
“난 춥지 않아요.”
 
재운과 주연은 계속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연은 늘 씩씩하다. 그때도 주연은 춥지 않냐는 질문에 씩씩하게 대답했었다… 주연은 사업이 계속 실패하시는 아버님과 병이 든 할머니, 그리고 공부를 잘해 이곳 전안에서는 꽤나 유명한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 병원비도, 동생의 학비도 아일랜드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구김살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맑고 씩씩하다.  주연에게 두번째 놀란 이유였다.  남동생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자랑하던 그때 주연의 모습 또한 눈에 선하다. 세번째 놀란건, 어느날 주연이 사촌오빠가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집 앞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사촌오빠라고 소개를 받긴 했지만 재운은 처음엔, 주연의 남자 친구인줄 알았다. 왜 나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할까 하는 의구심도 뒤로 미룬채 어쨌든 인사한다고 집까지 찾아와 준 덕에 맛있기로 소문난 중화요리집으로 데려가 탕수육을 사줬었는데, 그 저녁을 먹으며 진짜 사촌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됐었다. 평소엔 그렇게 씩씩하던 녀석이 그날따라 말도 잘 안하고 계속 고개를 삐죽이고 있던 모습 만큼이나 재운이 주연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지나를 만나지 안았었더라면… 어쩌면 재운은 이 어린 아이에게 마음을 빼았겼을지도 모른다...
 
“너와 운명을 함께 할 사람은 지나야!”
 
순간 수야가 재운에게 호통을 쳤다. 수야는 재운에게 말을 할때 귀로 말하지 않고, 늘 재운의 가슴을 울려 가슴으로 말한다. 수야는 재운에게, 지나가 운명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오늘까지 벌써 세 번째 호통을 쳤다. 덕분에 마냥 즐겁게 주연과 대화를 나누던 재운이 정신을 가다듬는다. 물론 재운도 잘 알고있다. 지나가 운명을 함께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수야가 알려 주기도 전에 지나를 만났고, 그녀를 잃어버리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사실이 수야의 인도함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재운은 늘 자신을 참견하고 간섭하는 수야에게 감사한다. 가슴이 뭉클 해질 만큼 말이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도 알아요…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나요...?”
 
눈을 깜빡거리며 지나를 떠올리는 재운. 
 
“아저씨, 전안 도착하면 술 한 잔 하고 갈까요?”
“아저씨 아침에 볼 일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하는데…”
“아저씬 맨 날 이 핑계 저 핑계…” 
“넌 술도 못하면서 맨 날 술 한 잔 하자는 소리는 왜 해?”
“아저씨들이 좋아하잖아요.”
 
이런 주연을 보며 재운은 그저 웃을 뿐이다.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사는 내내, 여기 저기서 희망을 느끼고 희망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람이 역사 안 두 사람이 앉아있는 의자로 까지 밀려 들어오고 눈을 깜빡거리며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재운 옆에서 주연은 계속 해맑게 웃으며 재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은 얼마를 벌었는지. 오늘은 무슨일이 있었는지...
 
“집은? 집은 어때?”
“네. 집은 좋아요!”
 
주연은 이렇게... 늘 씩씩하다...
 
머리로 아는것과 가슴으로 아는건 다른가보다… 아일랜드엔 주연 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한번도 가슴으로 느껴본 적은 없는 재운이다. 떠날수밖에 없어서 떠났지만, 어쩌면 성안을 떠나 이곳 전안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재운에게 이런 이들의 삶은 영원히 그저 동화속 작은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성공이란걸 하게되면 꼭 돌아봐야지... 하는 생각을, 재운은 이곳 전안에 와서 처음 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재운과 주연이 앉아있는 역 안 의자까지 흘러 들어온다. 새벽 겨울의 이 차가운 바람이, 재운에겐 여전히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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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
수야. 아일랜드의 창조자.
궁사. 수야의 몸종들.
사천. 수야의 심부름꾼.
재운.
지나.
홍사장.
박영보.
 
[ 목차 ]
제1장. 꿈. Coming soon.
제2장. 대리기사 홍사장.
제3장. 믿음.
제4장. 수야의 실체.
제5장. 수야의 개 박영보.
제6장. 어떤 창녀 이야기.
제7장. 저주받은 가족사.
제8장. 위대한 음모.
제9장. 지나의 죽음.
제10장. 심문.
제11장. 들어나는 실체.
제12장. 사라진 꿈.
 
[제1장 꿈]
제1화. 살자(自殺).
제2화. 대리운전.
제3화 재단(齋壇).
제4화. 카페 꿈.
제5화. 아일랜드.
 





 
-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