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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수퍼 전자기파(EMP) 실험.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군 지휘관들 (자료사진)>

 

북한이 단 한번의 공격으로 통신망과, 전력망을 파괴할 수 있는 수퍼 전자기파(EMP: Electro Magnetic Pulse) 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고 미국의 무기 전문가가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과거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핵무기 전문가로 근무했던 피터 프라이 박사인데요. 유미정 기자가 프라이 박사를 인터뷰했습니다.

 

문) 프라이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먼저 Electro Magnetic Pulse, EMP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시죠?

답) EMP는 높은 상공에서 핵무기를 폭발시킬 경우 생겨나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전자파를 말합니다. 보통 고도 30킬로미터 이상 대기권 외부에서 발생한 폭발이기 때문에 지구 표면에 핵 폭발과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없습니다. 반면 강력한 전자기파가 생겨나 공격 목표 지역의 모든 전기, 전자장비들을 태워버립니다.  만일 미 대륙 중심 상공 4백 킬로미터에서 EMP 탄이 폭발된다면 미국 전역의 전력망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문) 전기 시스템의 파괴가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됩니까?

답)  현대 사회는 전기 시스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전력망이 붕괴되면 은행, 금융 체계는 물론 통신, 교통 체계가 마비됩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냉장 시스템, 펌프 작동 불능으로 인한 식수 보급 차단 등으로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 그러면 수퍼  EMP 폭탄이란  그보다 더 강력한  EMP폭탄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폭발 시 초강력 에너지의 전자기파가 생겨나도록 특별히 고안된 폭탄입니다. 일반 EMP 폭탄과 달리 수퍼 EMP 폭탄은 특별 군사 장비처럼 방어장치가 돼 있는 시스템들도 파괴할 수 있도록 강력합니다. 수퍼 EMP 폭탄은 냉전 말기에 러시아가 핵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개발한 것입니다.

문) 박사님은 북한이 실시한 두 차례의 핵실험이 수퍼 EMP 폭탄을 실험한 것이라고 주장하시는데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답)  EMP폭탄을 개발한 러시아의 최고 과학자가 EMP위원회에 EMP 디자인 정보가 북한에 사고로 유출됐다고 밝혔습니다. 일단 핵무기 제조에 성공하면 수퍼 EMP 기능을 더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몇 년 안에 북한이 수퍼 EMP폭탄을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당시가 2004년이었습니다. 2년 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실시했지요.

 

전문가가 아니면 당시 실험은 실패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북한 핵무기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급 핵폭탄 처럼 약 10~15 킬로톤 가량의 폭발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1~3 킬로톤 정도의 위력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낮은 폭발력이 바로 수퍼 EMP무기의 특징입니다. 수퍼 EMP폭탄은 큰 폭발이 아니라, 이른바 ‘콤프턴 효과 (광자와 전자의 탄성 산란)’를 위해 ‘감마 선’을 발산해 내도록 고안됐기 때문입니다. 감마 선이 방출될 때 피시식 꺼지는 소리가 나는데, 이를 보고 핵실험이 실패한 것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죠.

 

문) 북한이 수퍼  EMP 폭탄 제조에 성공했더라도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미사일 개발은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답)  저는 북한이 미사일에 탑재가 가능한 소형 핵탄두 제조에 성공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의 3단계 문제를 해결한다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에 수퍼 EMP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미국이 EMP 공격을 받을 경우 즉각, 엄청난 보복 공격에 나설 것 같은데요?

답)  문제는 공격을 가한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군사적 보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노동 미사일처럼 사정거리 1천 5백 킬로미터의 단거리 미사일은 화물선에서도 발사가 가능합니다. 일반 화물선으로 위장한 배가 미국 근해에서 EMP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핵무기를 개발 중이며 북한과 협력하고 있는 이란의 경우 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시험하는 것이 여러 차례 포착됐습니다.

문)  그렇다면 미국은 EMP공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답) 미 의회 많은 의원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 하원에는  EMP에 대비하는 ‘방패법안(Shield Act)’이 제안돼 있고요,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MP 공격에 대비해 전력 시스템을 보호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장치를 설치하는 등 방호 대책 마련을 위한 것입니다.  또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EMP 공격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지금까지 피터 프라이 박사로부터 북한의 수퍼 EMP실험 가능성을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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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BM, SLBM, 핵잠수함, EMP 등등...

미국이랑 맞짱떠도 해볼만 한 수준임.

심지어 북한은 현재 지하요새가 미친 수준이라서 미국이 작정하고 덤벼도 질 수도 있음.

 

가장 중요한 게 핵융합폭탄 보다는 EMP인데, 피터프라이 박사에 의하면,

미국 전역을 마비시킬수도 있을 정도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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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핵 전자망마비 EMP폭탄 美본토에 재앙” WSJ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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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초월하는 지하 세계 존재.

 

 

“평양 같은 거대 도시, 땅 속에 있다”

 

탈북자 수가 1만3000여 명에 육박했다.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사선을 넘어 제3국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것이다. 얼마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정춘실(여·63)이 탈북해 태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가 없어 아직까지 설에 머물고 있으나 매체들의 보도를 종합해 볼 때 탈북의 정황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정춘실은 김일성의 양녀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을 자처하던 일물로, 김일성·김정일 2대에 걸쳐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아 ‘노력영웅’, ‘국민영웅’이라 일컬어지던 지도자다. 만약 그녀의 탈북이 사실이라면 잇따른 지도자급 망명으로 북한은 실로 큰 충격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왜 권력과 삶의 터전, 가족을 등지고 남한으로 향하는 것일까.

 

시사주간지 <사건의내막>에서는 1993년과 2006년에 각각 귀순한 인민군 간부 출신 임영선(45)씨와 박명호(44)씨를 통해 그동안 온갖 추측들만 난무했던 북한의 숨겨진 이야기와 공개되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해 들어봤다.

 

<▲(좌)전 인민군 대위 박명호, (우)전 인민군 중위 임영선.  ©브레이크뉴스>

 

충격 인터뷰 탈북자 군인 2人이 말하는 북한 군사기밀

 

함박눈이 내리던 2월26일, 인민군 중위 출신 탈북자 임영선씨와 전 인민군 대위 박명호씨를 만났다. 임영선씨는 1993년 7월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건너왔고 박명호씨는 2006년 가족들을 데리고 휴전선을 넘었다. 20년 넘게 독재정권 속에서 군 생활을 해오던 두 사람은 툭툭한 북한 사투리만 제한다면 대한민국 국적의 서울시민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음은 임영선, 박명호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편의상 전 인민군 간부시절 계급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 : 두 사람은 귀순한 시점은 다르지만 인민군 간부급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반인에 비해 비교적 나은 삶을 살았을 텐데 어떤 이유로 탈북을 결심했나.

임 중위 : ‘9·24사건’이라고 들어봤나? 아마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1991년 9월24일, 한 반란단체의 김일성·김정일 암살기도로 북한 군 내부는 물론 전역이 발칵 뒤집혔었다. 내가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임 중위는 이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 중위 : 1989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군 간부 몇 명이 모여 술을 마시며 정권을 비난하곤 했다. 처음부터 큰 뜻을 품고 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임이 잦아지며 자연스럽게 비밀 반란단체로 발전했다. 12명 가량이 모이면 늘 나라를 위한 혁명을 부르짖었고, 실행에 옮길 날만 손꼽았다. 그러다 1991년 추석이 가까워 왔을 때, 나와 동료들은 추석 성묫길에 나선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암살하기로 하고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다. 9월23일 나를 포함한 7명은 서로 흩어져 연변, 신의주, 개성 등을 돌며 ‘김일성·김정일이 총살됐다’라는 전단지를 뿌렸고, 같은 시각 나머지 동료들이 암살을 준비했다. 시간은 흘러 다음날 새벽,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든 계획은 실패했고 그 시각까지 부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잠잠했다. 이 사실은 전국에 뿌려진 전단지를 통해 9월24일 오전 6시 김정일에게 보고됐다. 곧 ‘9·24사건’으로 암살모의범의 수배가 시작된 것이다.

 

임 중위 “식량과 물자가 지하에 저장돼 있다. 전쟁으로 인한 폭격에도 최소한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고, 그곳에는 인민군복에 필요한 단추를 만드는 물자부터 용광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돼 있다”

 

당시 북한의 9·24사건은 마치 거대한 암살조직이 김일성, 김정일을 총살하려 했던 것으로 북한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이는 임영선씨를 포함한 12명의 작은 조직이었고 시도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간 계획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후 김정일의 끈질긴 추적은 계속됐고 사건발생 2년이 지난 1993년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임 중위는 결국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이다.

 

임 중위 : 당시 나를 쫓던 보위부(안기부) 출신 간부 중 4명이 귀순해 와 가끔 만나고 있다. 요즘도 술자리에서 보면 ‘2년 동안 너를 찾아 얼마나 헤맸는데 여기서 만나냐, 당장이라도 잡아다 김정일에게 넘기고 싶다’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곤 한다.

기자 :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관련해 아직까지 많은 설들만 존재할 뿐 어떤 게 진실이다고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북한 내부에서는 김일성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박 대위 : 북한 역시 많은 추측들이 있다. 민감한 사안이지만, 남한처럼 암살설이 돌기도 했고 심장마비였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추측은 남한과 달리 여러 가지 정황들이 있다. 먼저 암살설의 경우, 김일성이 사망하기 몇 달 전 평생 김일성의 건강을 지켜오던 주치의가 갑자기 김정일에 의해 바뀐 일이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후 얼마 있지 않아 군 간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 김일성은 생전에 새로운 주치의를 아주 좋아했고, 그의 실력에 만족했다는 것. 둘째, 김형직(김일성 父)이 생존당시 김일성에게 뱀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얼마 전 산에 갔다가 뱀을 피하지 못하고 치어 죽인 사실이 있으니 죽음을 예견한 불길한 징조였다는 것이었다. 간부들은 강연을 듣고는 있었지만 도대체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다들 의아해했고, 나중에 퍼진 소문이 김일성의 암살을 정당화하려는 계략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들이었다. 그리고 심장이상설의 경우, 내가 공군으로 근무했기에 자세히 알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나흘 전인 7월4일, 심폐소생술 장비를 실은 헬기 두 대가 급하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기상악화로 한 대는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한 대는 급선회해 돌아왔다. 이것을 두고 김일성이 사망하기 며칠 전부터 심장에 이상이 왔던 게 아니었나 소문이 돌았고 심장마비라는 설이 나온 것이다.

 

임 중위 "핵 존재, 핵탄두로 사용 가능한지가 관건, 아직까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박 대위 "80년 이후 핵 연구·실험 거의 진전 없었다. 북한의 기술력으로 핵사용 불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

 

 

박 대위는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본 인물로서 비교적 구체적인 정황들을 근거로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김일성의 주치의가 주석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존 주치의의 경우, 24시간 김일성의 스케줄부터 심장박동까지 체크해 일정이 조금이라도 늦춰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맥박에 이상이 생길 시 바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게 하고 김일성을 데려가 안정을 취하게 했다고 한다. 천하의 김일성조차 주치의에게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임 중위와 박 대위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 간의 알력다툼 정황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많았다.

 

임 중위 : 아들 김정일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외교활동에만 전념하던 시절, 김일성은 경제상황이나 내부문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1년 말, 나라가 부도 직전에 있으나 보고조차 되지 않은 사실을 안 김일성이 김정일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가면 직무실에서 큰소리가 나기 일쑤였고,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보고되는 모든 보고는 나를 거치지 않을 시 총살시키겠다’고 엄포를 놔 사실상 알력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정치는 네가 하고, 경제는 내가 맡겠다’라고 제안해 긴장은 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경제문제와 관련해 김평일(김정일의 이복형제)과 접촉한 사실을 감지한 김정일이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던 중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으니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혹들이 전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北 경제악화, ‘핵무기만이 살 길이다’

 

기자 : 전쟁의 위기에 노출돼 있던 남한은 김일성 사망 직후 전쟁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였다. 당시 북한은 어떤 상황이었으며, 김일성 생존 당시 전쟁의 의지는 없었나.

박 대위 : 20년 넘게 군 생활을 했지만 그런 계엄령은 처음 봤다. 어린이,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계엄 상태였다. 보름 동안 나라가 마비됐고 생업활동마저 중단된 채 모두 tv 앞에 있었다. 그리고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부터 찾아왔다. 남한방송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와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북한 전역이 분노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부대는 언제라도 전쟁이 개시되면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삼엄한 태세를 갖췄다.

임 중위 : 91년경, 경제악화가 심화되자 김일성이 1995년 안에 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군에는 전투식량은 고사하고 영양실조에 빠져 제대로 된 훈련조차 이뤄질 수 없는 상태였다.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즉각적으로 야간비행훈련과 낙하훈련, 연합작전훈련을 펼쳤으나 결과는 참담했고, 김일성은 현실상 무력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핵무기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핵을 반드시 사용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임 중위는 이어 당시 연합작전 훈련과 관련된 재미있는 후일담을 공개했다.

 

임 중위 : 1991년 김일성은 도발 적절시기와 승률을 분석하기 위해 전 군에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지시했다. 제대로 먹지도 훈련받지도 못한 군사들은 각각 육·해·공별로 작전을 시행했다. 그러자 야간 낙하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추락지점을 구분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두워 땅이 보이지 않자 총탄과 짐을 모두 벗어 던져 살 궁리에 바빴던 것. 다음날 수백 명의 농민들이 논밭을 줄지어 걸어 다니면서 낙하훈련 도중 인민군이 집어던진 총탄을 찾는 수색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전했다. 보병들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임 중위 : 탱크를 가지고 하루 동안 이동해야 할 거리를 일주일에 걸쳐 겨우 도달해 상부의 질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소 기름이 없어 중요한 훈련 외에 쓰지 않았던 탱크가 이동 중 말썽을 부렸고, 험준한 길을 통과하지 못해 전복되는 사고가 잇따라 전쟁은커녕 이동마저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김일성이 60년대부터 계획해온 핵무기 개발을 재촉한 것이고, 1993년 비로소 북한의 핵 기지와 핵무기에 대한 실상이 알려져 한반도 전체를 긴장시켰다.

기자 :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북한의 핵무기 보유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현황은 어떤가. 상용화할 수 있는 핵폭탄이 확실히 존재하는가.

임 중위 : 물론 핵은 존재한다. 핵탄두로 사용이 가능한지가 관건인데 아직까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북한은 개발된 핵무기를 탄두에 달아 쏠지, 미사일이나 마하 3.2 정도의 빠른 전투기에 실어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핵을 제거하는 데 국제사회의 힘을 모아야 한다.

 

임 중위는 핵 존재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박 대위는 달랐다.

 

박 대위 : 2006년 한국으로 넘어올 당시까지 사실상 북한 전역은 파업상태였다.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로, 1980년 이후 핵 연구나 실험은 거의 진전이 없었으며 남한이 알고 있는 핵의 존재는 실상과 다르다. 30년에 걸친 연구 끝에 개발된 대포동미사일 조차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북한의 기술력으로는 핵사용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기자 : 북한은 특수부대가 유명하다. 일반 부대와 달리 예전 명성에 큰 변화가 없나.

박 대위 : 북한 특수부대는 잘 만들어진 살인무기로 보면 된다. 한국의 어떤 부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북한에 ‘남쪽 산 사람과 북쪽의 죽은 사람은 절대 안 바꾼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북쪽 특수부대는 누구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뛰어나다는 말이다.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북의 일반 부대는 자기 진영에서 싸우고 특수부대는 적군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현재 특수부대는 각각 서울과 광주, 강원도, 부산 등 전국을 목표로 나누어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기자 : 북한에 거대한 지하 본부가 존재한다는 설이 있다. 사실인가.

임 중위 : 나는 북한에서 미사일이나 핵 등 기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지하에 비행장까지 갖춰져 있다고 하면 믿겠는가. 상상을 초월하는 지하 세계가 존재한다. 북한이 폭격으로 휩쓸려도 최소한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식량과 물자가 땅 속에 묻혀 있다. 평양이라는 거대 도시가 땅 속으로 이동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곳에는 인민군복에 필요한 단추를 만드는 물자부터 용광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하고 있다.

기자 : 끝으로 탈북민으로서 남한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박 대위·임 중위 : 우스갯말로, 1990년대까지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의사, 변호사, 다음으로 귀순용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좋은 위치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힘든 시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남한은 탈북자들에게 따뜻한 나라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부 탈북자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부랑아로 전락했고, 이 때문에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따가워졌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과거 남한으로 오는 사람들은 정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북한의 노동층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절대 아니다. 이들을 남한이 받아들여 성실하게 일하며 먹고살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 나도 현재 일용직 노동일을 하고 있다. 내 일에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도 조국의 통일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 테니 따뜻한 시각으로 우리를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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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사기술이 이렇게까지 발전한 이유는, 소련이 망하기 직전에 모든 기술을 북한이 가져왔음.

거기에 이란같은 나라에서 기술협조 받아서 군사기술이 저렇게까지 발전한거임.

심지어 수십년간 만든 지하요새는 정말 미친 수준이라고 함.

 

니들 생각보다 현재 북한은 매우 강력함.

그지라고 만만히 보면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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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지하도시라...

충분히 예측가능한 상황이지만...

왜냐하면 땅굴도 파는 이들이 아닌가...

드러나지 않을 진실을 없으니, 지켜봅시다...

 

 

 

 

+ 북한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다

 

북한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다 – 43Gear

와 무슨 개미도 아니고...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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